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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누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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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482년경 현재 북마케도니아 지역에서 태어난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그는 삼촌 유스티누스 1세의 도움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육을 받고, 황제가 된 삼촌을 보좌하다가 527년 단독 황제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아내 테오도라와 함께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히스파니아 등지를 정복하며 로마 제국의 영토를 확장했고, 로마법 대전 편찬,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재건축 등 대규모 건축 사업을 추진했다. 또한 종교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여 동서 교회의 통합을 시도했으나, 단성론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지만, 과도한 원정과 건축 사업으로 재정을 악화시키고, 그의 사후 동로마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생애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482년경 다르다니아의 타우레시움에서 태어났다.[9][10][11] 그는 라틴어를 모어로 사용했으며, 농민 출신으로 일리리아-로마[13][14][15] 또는 트라키아-로마[16][17][18] 출신으로 여겨진다. "이우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은 그의 삼촌인 유스티누스에게 입양되었음을 보여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온 유스티니아누스는 법학, 신학, 로마 역사에 대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110]

518년 아나스타시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유스티누스가 새 황제로 선포될 때 유스티니아누스는 큰 야망을 보였으며, 유스티누스가 노쇠해짐에 따라 사실상 통치자가 되었다.[110] 527년 4월 1일 공동 황제로 즉위했고,[26] 같은 해 8월 1일 유스티누스가 사망하자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26]

유스티니아누스는 "결코 잠들지 않는 황제"로 알려질 만큼[28] 통치에 엄청난 활력을 보였다. 525년경 테오도라와 결혼하여 제국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는 초기에 니카 폭동으로 위기를 맞았으나, 테오도라의 격려와 벨리사리우스 등 장군들의 활약으로 진압되었다. 540년대 초 역병에 걸렸지만 회복했다. 548년[32] 테오도라가 사망한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종교 문제에 더욱 몰두했다. 565년 11월 14일 자식 없이 사망했으며,[34] 그의 조카 유스티누스 2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시신은 성사도 교회에 안치되었지만, 제4차 십자군 때 1204년 도시 약탈 중에 파괴되고 약탈당했다.[35]

바르베리니 상아판. 유스티니아누스 1세 또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를 묘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만년. 라벤나의 산타폴리나레 누오보 성당 모자이크

2. 1. 어린 시절과 집권

482년경 유스티니아누스는 다르다니아 타우레시움(오늘날 북마케도니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9][10][11] 그는 라틴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으며, 아마도 마지막 라틴어 사용 로마 황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2] 그의 어머니 비길란티나는 훗날 황제가 되는 유스티누스의 여동생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은 훗날 유스티누스에게 입양되면서 사용하게 된 이름이다.[19][20][21]

유스티누스는 황실 경비대 사령관까지 승진한 유능한 군인이었다. 그는 아들이 없었기에 유스티니아누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데려와 양육하고 양자로 삼았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실 경비대에서 삼촌을 보좌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는 법학, 신학, 로마 역사에 대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110]

518년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후사 없이 죽자, 유스티누스는 혼란을 틈타 근위대를 장악하고 황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큰 도움을 주었다. 유스티누스는 통치 능력이 부족했기에 유스티니아누스에게 크게 의지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미천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학식이 뛰어나고 신중한 판단력으로 국정을 운영하여 원로원 등의 신임을 얻었다.

527년 4월, 유스티누스는 유스티니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고, 같은 해 8월 유스티누스가 사망하면서 유스티니아누스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26]

2. 2. 테오도라 황후

산 비탈레 성당 모자이크에 묘사된 황후 테오도라


황태자 시절, 유스티니아누스는 서커스 극단의 배우 출신인 테오도라와 사랑에 빠졌다. 테오도라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명한 배우였는데, 당시 배우는 노예나 가난한 사람들이 종사하던 천한 직업이었고, 여배우는 매춘을 겸하기도 했다.[245]

테오도라의 아버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한 서커스단에서 곰을 조련했는데, 그녀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테오도라를 서커스단 배우로 키웠다. 테오도라는 한 고관과 눈이 맞아 북아프리카로 가서 살림을 차렸다가 딸 하나를 낳고 버림받았다. 유스티니아누스를 만난 것은 그녀가 스물다섯 살 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직후였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나이는 마흔 살이었고,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다.

당시 제국법에는 귀족평민과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로원 의원 신분인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와 결혼할 수 없었다. 특히 황후이자 외숙모인 유페미아의 반대가 극심했다. 524년 유페미아가 세상을 떠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삼촌인 황제를 설득해 귀족도 낮은 계급과 결혼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고, 525년 마침내 테오도라와 결혼했다.[246]

527년 유스티니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테오도라는 황후(아우구스타)로서 사실상 공동 통치자로 활약했다. 그녀는 남편의 법안에 공동 서명하고, 외교 사절을 접견했으며, 군대와 관리들을 통솔하는 등 제국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편견을 품었던 귀족들도 테오도라 황후의 훌륭한 처신에 감탄했으며, 그녀는 평생 남편을 도왔다.[247]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유능하지만 인기 없는 고문들을 선택하는 경향 때문에 재위 초 니카 폭동으로 황제 자리를 위협받았다.

2. 2. 1. 니카의 반란

53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일어난 시민 폭동인 니카의 반란으로 유스티니아누스는 거의 제위를 빼앗길 뻔하였다. ‘니카’는 그리스어로 ‘이기자’, ‘정복하자’를 뜻하는 말로, 서커스나 전차 경주를 보면서 관중들이 외치던 응원 구호였다. 최고의 인기 스포츠인 대전차 경주에는 팬덤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중 청색당과 녹색당이 반란을 주도했다. 청색당은 원로원을 비롯한 상류층, 녹색당은 상공업자나 중간 관리직들이 주로 모였다.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는 청색당이었다.

폭력 사태가 벌어지자 치안 책임자는 일곱 명을 체포해 사형 판결을 내렸다. 문제는 사형 집행 도중 사형대가 넘어지면서 두 명이 살아남은 데에서 시작됐다. 두 당 사람들은 이들을 풀어 달라고 요구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기회에 당파 사이의 분쟁과 소요 사태를 뿌리 뽑으려고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두 당 사람들이 힘을 합쳐 폭동을 일으켰고, 여기에 황제의 왕권 강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원로원 등 지배세력이 가담해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군중들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심복이었던 요하네스와 트리부니아누스의 해임을 요구하면서 황궁으로 몰려들었다.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불을 지르고, 관리들을 살해하고, 심지어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불살랐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테오도라 황후는 "황제는 황제답게 떳떳하게 죽어야 합니다."라고 격려하여[249] 황제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벨리사리우스 등의 장군들을 불러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경기장에서 30,000명[160]의 무장하지 않은 시민이 살해되었고, 테오도라의 주장에 따라 (유스티니아누스 자신의 판단과는 반대로[161]),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조카 등은 처형되었다.[162]

2. 3. 대제 유스티니아누스

482년경, 유스티니아누스는 다르다니아의 타우레시움에서 태어났다.[9][10][11] 라틴어를 모어로 사용한 그는 농민 가정 출신으로, 일리리아-로마[13][14][15] 또는 트라키아-로마[16][17][18] 출신으로 여겨진다. "이우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은 그의 삼촌인 유스티누스에게 입양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와서 법학, 신학 및 로마 역사에 대해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110]

518년 아나스타시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유스티누스가 새 황제로 선포될 때 유스티니아누스는 큰 야망을 보였으며, 유스티누스가 통치 말기에 노쇠해짐에 따라 사실상 통치자가 되었다.[110] 527년 4월 1일에 공동 황제로 즉위했고,[26] 527년 8월 1일 유스티누스의 사망 후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26]

통치자로서 유스티니아누스는 엄청난 활력을 보였으며 "결코 잠들지 않는 황제"로 알려져 있었다.[28] 525년경 그는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테오도라는 제국의 정치에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는 보편적으로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니카 폭동 동안 왕위를 잃을 뻔했고, 562년에는 황제 암살 음모가 발각되었다.[31] 540년대 초 역병에 걸렸지만 회복했다. 548년[32] 테오도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녀보다 거의 20년 더 오래 살았다. 그는 565년 11월 14일에 자식 없이 사망했다.[34] 그는 그의 누이 비길란티아의 아들이자 테오도라의 조카인 유스티누스 2세에게 계승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시신은 성사도 교회에 특별히 건설된 능묘에 안치되었지만, 제4차 십자군의 라틴 국가들에 의해 1204년 도시 약탈 중에 파괴되고 약탈당했다.[35]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유능하지만 인기 없는 고문들을 선택하는 버릇 때문에 재위 초기에 황제 자리를 위협받았다. 532년 1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전차 경주 파벌들은 니카 폭동을 일으켰다. 군중이 거리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동안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바다를 통해 수도에서 도망칠 것을 고려했지만, 결국 그의 아내 테오도라의 권유에 따라 남기로 결정했다. 이후 이틀 동안 그는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 장군에게 폭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프로코피우스는 히포드롬에서 3만 명의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전한다.[45]

542년 봄, 선페스트로 인한 역병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덮쳐 재무관 트리보니아누스를 비롯한 시민 23만 명이 사망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도 감염되어 사경을 헤맸고, 후사가 없었기에 군대와 관리들이 크게 동요했다. 테오도라 황후는 수도 근위병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 후 벨리사리우스와 부제스를 즉시 소환했다. 황제가 아직 살아있어 두 장군은 소환에 응했고, 황후는 부제스를 황궁 지하 감옥에 28개월 동안 감금했으며, 벨리사리우스의 지휘권과 재산을 몰수했다. 그사이 황제는 회복되었다.[251]

만년의 유스티니아누스는 군을 경시했기 때문에 군대는 약체화되었다. 또한 침입하는 이민족에 대해서는 돈으로 분쟁을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국가 재정도 파탄났다.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북방으로부터의 이민족 침입과 사산 왕조의 공격을 받아 제국은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8세기 중반까지 외부의 침입과 국내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프로코피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를 "잔혹하고 탐욕스럽고 무능한 통치자"로 보았다.[146]

2. 3. 1. 능력 위주의 행정과 정복 활동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신분이 아닌 능력으로 인재를 선발하여 로마 황실과 귀족의 부정부패를 없애고 귀족 계급을 견제하였다.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 등 우수한 장군을 등용하여 옛 로마 제국의 영토를 많이 회복하였고, 특히 이탈리아반도 본토를 회복하는 데 힘썼다. 불가르족과 슬라브족의 침입을 막았고, 북아프리카에서 제국의 영향력을 강화하였다.[48]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Cornelius Gurlitt)가 1912년 재구성한 유스티니아누스 기둥. 543년 콘스탄티노플의 아우구스타이온에 그의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5세기 제국 통제에서 벗어났던 서지중해 분지 주변의 광대한 영토 회복은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의 가장 빛나는 업적 중 하나였다.[49] 그는 군사 원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법률 서문에서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고 예술 작품을 통해 기념하게 했다. 재정복은 그의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주로 수행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북아프리카반달족 왕국을 공격했다. 530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힐데리크 왕은 사촌 겔리메르에게 폐위되었다. 힐데리크 왕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겔리메르에게 왕국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겔리메르는 이를 거부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사산 왕조와의 전쟁을 끝내고 533년 반달족에 대한 원정을 준비했다.[53]

533년 벨리사리우스는 약 1만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아프리카로 가서 라스 카부디아에 상륙했다. 아드 데키뭄 전투와 트리카마룸 전투에서 반달족을 패배시키고 카르타고를 점령했다. 겔리메르 왕은 도망쳤지만 이듬해 봄 항복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갔다. 사르데냐, 코르시카, 발레아레스 제도, 셉템 프라트레스가 회복되었다.[54]

534년 아프리카 재정복을 기념하는 금화 메달


이 전쟁으로 아프리카는 황폐해졌고, 500만 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55] 534년 4월 아프리카 총독령이 설립되었지만,[56] 15년 동안 베르베르족과의 전쟁과 군사 반란으로 붕괴 직전에 놓였다.[57] 548년까지 평정되지 않았지만,[58] 이후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아프리카 회복으로 제국은 약 약 45359.20kg의 금을 얻었다.[59]

내부 위기를 극복한 유스티니아누스는 532년 6월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영구 평화 조약”을 맺어 동방 국경을 안정시켰다. 533년 베리사리우스 장군을 북아프리카로 파견하여 반달 왕국을 정복했다.

535년 동고트 왕국의 내분을 이용하여 베리사리우스를 이탈리아로 파견했다. 이듬해 말 로마를 탈환했으나, 동고트 측의 강력한 저항으로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540년 베리사리우스가 동고트 왕국의 수도 라벤나를 공략하고 동고트 왕 위티기스를 사로잡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으나,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여전히 동고트의 잔당이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같은 해 사산 왕조와의 항쟁을 재개하여 제국의 동서 양쪽에 적을 두게 된다.

552년 베리사리우스를 대신한 나르세스 장군이 이탈리아에서 저항하던 동고트 왕 토틸라를 전사시키고, 테이아를 무찌르고 동고트 잔당을 섬멸하여 554년 말까지 이탈리아 반도의 평정을 완료했다. 그러나 긴 전쟁으로 이탈리아는 황폐해졌다. 같은 해, 서고트 왕국으로부터 이베리아 반도 남동부의 영토를 탈취했다. 지중해 전역에 "로마 제국"의 지배를 회복했다.

2. 3. 2. 교회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정력적인 황제로,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수많은 개혁을 단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세 차례에 걸쳐 로마법을 집대성했으며, 신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단성론 문제로 동방 정교회와 대립하기도 했지만, 교회교리와 이론을 정리하였다.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비하고 하기아 소피아를 건축하는 등 위대한 건축 사업을 벌였다.[159]

2. 3. 3. 로마법 대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사법 개혁으로 오랫동안 지속되는 명성을 얻었다. 특히, 그 전까지 시도된 적이 없던 로마법의 완전한 개정으로 유명하다. 그 법제의 집대성이 오늘날 『'''로마법 대전'''』(Corpus Iuris Civilis)으로 알려져 있다.

치세 초기, 유스티니아누스는 쿠아이스트르 트리보니아누스를 이 작업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529년 5월 7일 2세기 이후의 제국 각 법을 성문화한 칙법휘찬의 첫 초안이 발표되었다.[38] 최종본은 534년에 발표되었다. 533년에는 과거의 법학설을 편찬한 학설휘찬이 발표되었고, 주요 법률을 해설한 교과서인 법학제요가 그 뒤를 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치세하의 신법을 편찬한 신칙법이 로마법대전을 보충하고 있다. 다른 대전과는 대조적으로, 신칙법은 동로마 제국 내의 일반어인 그리스어로 쓰여 있다.[38]

『로마법대전』은 라틴 법철학(교회법전 포함)의 기초를 형성했고, 역사가들에게 후기 로마 제국의 관심과 활동에 대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38] 편찬물로서 이것은 공식적인 법률, 원로원의 협의(senatusconsulta), 칙령, 판례 그리고 법학자의 의견과 해석(responsa prudentum) 등 저술되거나 발표된 법(leges)과 기타 규칙으로 구성된 많은 자료를 집적한 것이다.

트리보니아누스의 법전은 로마법의 지속을 보장했다. 바실레이오스 1세와 레온 6세 시대에 편찬된 『바실리카 법전』(βασιλικός|바실리코스gkm)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이것은 동로마의 법률의 기초가 되었다. 서방 지역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법이 도입된 것은 이탈리아뿐이었지만 (정복 후 554년에 발표된 국본칙령에 의해)[39], 여기에서 12세기서유럽으로 전해져 많은 유럽 국가의 법전의 기초가 되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동유럽에도 전해져 슬라브어판이 저술되었고, 러시아에도 전해졌다.[40] 로마법대전은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세기 독일의 법사학자 루돌프 폰 예링은 "로마는 세계를 세 번 지배했고, 수많은 민족을 세 번 결합하여 통일했다."라고 말하며 로마법이 로마제국이 인류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이라고 평가했다.[250]

로마법 대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법전명설명
칙법휘찬 (Codex Constitutionum)제국의 모든 로마법에 최고 권위를 가지는 법
학설휘찬 (Digesta, Pandectae)고대 로마의 모든 법률가의 주요 저작을 포함하여 법학설을 정리한 책
법학제요 (Institutiones)위 두 법전에서 주요 내용을 발췌하여 제국 내 법학교에서 사용할 교과서



이 법전에는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분쟁 상황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252]

입법 과정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여성의 권리를 상당한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남녀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결혼을 못 하게 하는 법을 철폐했고, 여성에게 지참금을 강요하지 못하게 했으며, 지참금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이혼하지 못하게 했다. 이혼할 때는 남녀가 같은 권리를 누리게 하고, 배우자의 부정에 대한 처벌도 동등하게 만들었다.[252]

2. 3. 4. 유스티니아누스 역병과 테오도라의 반란 진압

542년 봄, 선페스트로 인한 역병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덮쳐 재무관 트리보니아누스를 비롯한 시민 23만 명이 사망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도 감염되어 사경을 헤맸고, 후사가 없었기에 군대와 관리들이 크게 동요했다. 벨리사리우스는 황제를 몰아낼 생각은 없었으나, 부제스 등 몇몇 장군을 규합하여 황제 사후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선동했다. 테오도라 황후는 수도 근위병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 후 벨리사리우스와 부제스를 즉시 소환했다. 황제가 아직 살아있어 두 장군은 소환에 응했고, 황후는 부제스를 황궁 지하 감옥에 28개월 동안 감금했으며, 벨리사리우스의 지휘권과 재산을 몰수했다. 그사이 황제는 회복되었다.[251]

532년 1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전차 경주 파벌들은 평소 라이벌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대항하여 니카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트리보니아누스와 다른 두 명의 장관을 해임하도록 강요했고,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전복하고 고인이 된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조카인 상원의원 히파티우스를 황제로 세우려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바다를 통해 수도에서 도망칠 것을 고려했지만, 테오도라의 권유에 따라 남기로 결정했다. 이후 이틀 동안 그는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 장군에게 폭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프로코피우스는 히포드롬에서 3만 명의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전한다.[45] 테오도라의 주장에 따라,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조카들을 처형했다.[47]

2. 4. 말년의 유스티니아누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황후 테오도라보다 약 20년을 더 살았으며, 만년에는 신학 문제에 더욱 깊이 관여했다.[164] 553년에는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직접 주재하기도 했다.

552년, 나르세스 장군은 이탈리아에서 저항하던 동고트 왕 토틸라를 부스타 갈로룸 전투에서 전사시키고, 그 뒤를 이은 테이아마저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격파하여 동고트 잔당을 섬멸, 554년 말까지 이탈리아 반도 평정을 완료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이탈리아는 황폐해졌고, 로마 시의 인구는 500명까지 감소했다고도 한다.[165] 같은 해, 서고트 왕국으로부터 이베리아 반도 남동부 영토를 탈취하여 지중해 전역에 걸쳐 "로마 제국"의 지배를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2. 4. 1. 황후의 사망

548년 황후 테오도라가 사망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그 후로도 17년을 더 살았다. 황후가 사망한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종교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통치를 소홀히 하였고, 벨리사리우스 같은 유능한 장군을 시기하고 의심하는 모습을 보였다.[45]

2. 4. 2. 죽음

565년 11월 13일부터 14일 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서거했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에,[34] 황제 자리는 그의 여동생 비길란티아의 아들이자 테오도라 황후의 조카딸 소피아와 결혼한 유스티누스 2세가 계승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시신은 성사도 교회에 특별히 조성된 능묘에 안치되었으나,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라틴 제국 세력에 의해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과정에서 파괴되고 약탈당했다.[35]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만년에 군대를 경시하여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외침을 돈으로 해결하려 해 국가 재정을 파탄시켰다. 그의 사후, 북방 민족들의 침입과 사산 왕조의 공격으로 제국은 급속히 쇠퇴했으며, 8세기 중반까지 외부 침입과 내부 혼란이 지속되었다.

3. 로마법 대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사법 개혁으로 오랫동안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이전까지 시도된 적 없던 로마법의 완전한 개정으로 유명하다. 그 법제의 집대성이 오늘날 『'''로마법 대전'''』(Corpus Iuris Civilis)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칙법휘찬』(Codex Justinianus), 『학설휘찬』(Digesta 또는 Pandectae), 『법학제요』(Institutiones), 그리고 『신칙법』(Novellae)으로 구성된다.

치세 초기, 유스티니아누스는 쿠아이스트르 트리보니아누스를 이 작업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2세기 이후의 제국 각 법을 성문화한 칙법휘찬의 첫 초안은 529년 5월 7일에 발표되었고, 최종본은 534년에 발표되었다. 533년에는 과거의 법학설을 편찬한 학설휘찬이 발표되었고, 주요 법률을 해설한 교과서인 법학제요가 그 뒤를 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치세하의 신법을 편찬한 신칙법은 로마법 대전을 보충한다. 다른 대전과는 대조적으로, 신칙법은 동로마 제국 내의 일반어인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로마법 대전』은 라틴 법철학(교회법전 포함)의 기초를 형성했고, 역사가들에게 후기 로마 제국의 관심과 활동에 대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 편찬물은 공식적인 법률, 원로원의 협의(senatusconsulta), 칙령, 판례, 법학자의 의견과 해석(responsa prudentum) 등 저술되거나 발표된 법(leges)과 기타 규칙으로 구성된 많은 자료를 집적한 것이다.

트리보니아누스의 법전은 로마법의 지속을 보장했다. 바실레이오스 1세와 레온 6세 시대에 편찬된 『바실리카 법전』(βασιλικός|바실리코스gkm)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이것은 동로마의 법률의 기초가 되었다. 서방 지역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법이 도입된 것은 이탈리아뿐이었지만 (정복 후 554년에 발표된 국본칙령에 의해)[166], 여기에서 12세기서유럽으로 전해져 많은 유럽 국가의 법전의 기초가 되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동유럽에도 전해져 슬라브어판이 저술되었고, 러시아에도 전해졌다.[167] 로마법 대전은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4. 군사적 업적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중세 로마 황제 중 가장 큰 군사적 업적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인 황제로서 그는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는 데 큰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본인이 직접 군사 원정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 같은 당대의 명장들을 기용하여 정력적으로 영토를 회복하고 6세기 로마 제국의 영토 확장을 이루었다.

황제 즉위 초기 그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530년 다라 전투에서 페르시아군과 싸워 승리했으나 531년 유프라테스 강가의 칼리니쿰 전투에서 완패하고 다음 해 ''영구 평화 조약''을 맺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보상금으로 페르시아에 약 4989.51kg의 황금을 지급했고, 이때 맺은 강화로 동쪽 변방의 안전을 확보하고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던 아리우스파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준비하였다.

533년 벨리사리우스북아프리카 반달 왕국에 파견하여 아드 데키뭄 전투와 트리카마룸 전투에서 승리하고 카르타고를 점령, 반달 왕국을 멸망시켰다. 겔리메르 왕은 항복 후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갔고, 사르데냐, 코르시카, 발레아레스 제도, 세우타가 회복되었다.[54] 아프리카 총독령이 설립되었으나,[56] 15년간 베르베르족과의 전쟁 등으로 붕괴 직전에 놓였다.[57] 548년까지 평정되었고,[58] 이후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535년 동고트 왕국 내분을 이용하여 벨리사리우스를 이탈리아에 파견, 540년 수도 라벤나를 함락하고 왕 위티기스를 사로잡았으나, 동고트 잔당이 저항했다. 같은 해 사산 왕조와 항쟁을 재개하여 동서 양쪽에 적을 두게 되었다.

543년 흑사병(유스티니아누스의 페스트) 대유행으로 정부 기능이 마비되고 인적 자원이 타격받아 로마 제국 재건 사업이 쇠퇴했다. 548년 황후 테오도라가 사망했다.

서고트 왕국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552년 리베리우스에게 병력 2,000명을 주어 파견했다. 동로마군은 카르타헤나와 남동부 연안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스파니아 속주(''Provincia Spaniae'')를 설치했다. 이 전역은 동로마 제국의 팽창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에는 발칸 반도는 도나우 강 이북에 거주하는 튀르크계 및 슬라브계 여러 민족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이 지역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주로 외교적 수단과 방어 시스템 구축에 의존했다. 559년에 자벨가네스 칸이 이끄는 스크라비니족과 쿠트리굴족이 침입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했으나, 벨리사리우스에 의해 격퇴되었다.

로마 제국 재건 야망은 부분적으로만 실현되었다. 530년대 군사적 성공 이후 장기간 침체했고, 고트족과의 전쟁은 이탈리아를 파멸시켰다.[185] 중과세는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 최종 승리와 남부 스페인 정복은 제국 위신에 기여했지만, 대부분 덧없었다. 이탈리아 대부분은 568년 롬바르드족 침략으로 상실되었고, 1세기 내 아프리카 절반과 스페인이 제국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말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자체도 북쪽 야만족 침입에 안전하지 않았고, 호의적인 역사가 메난드로스 프로테크토르조차 노령으로 인한 쇠약 때문에 황제가 수도 방어에 실패했다고 설명했다.[186] 유스티니아누스는 동로마 제국 영토를 위험할 정도로 확장하면서 6세기 유럽 변화를 고려하지 못했다.[187] 역설적이지만, 그의 군사적 성공이 제국 쇠퇴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188]

4. 1. 북아프리카 원정 (533–534)

아프리카 재정복을 기념한 현대 또는 근대의 대형 메달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처음 공격한 서로마 왕국은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이었다. 530년, 유스티니아누스와 현지 가톨릭 교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힐데릭 왕이 사촌인 겔리메르에게 폐위되었다. 투옥되고 폐위된 힐데릭은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53]

533년, 92척의 드로몬(전함)에 의해 호위받는 500척의 수송선으로 출정한 벨리사리우스는 1만 5천 명의 병사와 여러 부대의 야만인 병사들을 이끌고 현재의 튀니지 카푸트 바다 (현재 라스 카부디아)에 상륙했다. 벨리사리우스는 9월 14일의 아드 데키뭄 전투와 12월의 트리카마룸 전투에서 반달 군대를 기습하여 격파하고 카르타고를 점령했다. 겔리메르누미디아의 파푸아 산으로 도망쳤지만 이듬해 봄에 항복했다. 겔리무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어 개선식에서 끌려다녔다. 이 전투로 사르데냐코르시카, 발레아레스 제도 그리고 몬스 칼페(후에 지브롤터로 명명됨) 건너편의 셉템 프라트레스 요새가 회복되었다.[54]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이룩한 동로마 제국의 최대 영토.


534년 4월 아프리카 속주가 설치되었지만,[56] 이후 15년 동안 베르베르족과의 전쟁과 끊임없는 반란으로 혼란스러워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57] 이 지역은 548년까지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지만,[58] 그 후에는 평화를 되찾고 어느 정도의 번영을 누렸다. 아프리카의 회복을 위해 제국은 약 45359.20kg의 금을 지출했다.[59]

4. 2. 첫 번째 이탈리아 원정 (535–540)

532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영구 평화 조약”을 맺어 동방 국경을 안정시킨 유스티니아누스는 서방으로 눈을 돌렸다. 옛 서로마 제국이 있던 이 지역에는 아리우스파 게르만족 국가들이 성립해 있었다. 동고트 왕국에서 왕위를 놓고 내분이 일어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이탈리아 수복의 기회로 삼고 535년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했다.[168] 벨리사리우스는 재빨리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하여 536년 나폴리를 회복했고 같은 해 12월 9일 로마를 다시 제국의 품으로 수복했다. 동고트족비티게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대군을 모아 537년부터 538년 봄까지 로마를 포위공격했으나 벨리사리우스는 잘 막아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또 다른 장군 나르세스를 이탈리아로 보냈는데, 이는 사실상 벨리사리우스를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 사이에 알력이 생겼고 이 때문에 원정에 차질이 생겼다. 밀라노를 탈환했다가 다시 잃자 나르세스는 소환당하고 벨리사리우스는 540년 동고트 왕국의 수도인 라벤나를 점령했다. 이때 동고트족은 벨리사리우스에게 왕국 절반을 주겠다고 제안했고, 벨리사리우스는 도시 탈환을 위해 이것을 받는 척하며 라벤나를 점령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때 벨리사리우스를 의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했다.[169]

4. 3.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대결 (540–562)

530년 다라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에게 승리했지만, 531년 칼리니쿰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후, 532년 유스티니아누스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영구 평화 조약'을 맺었다.[50] 유스티니아누스는 페르시아에 약 4989.51kg의 황금을 보상금으로 지급해야 했다.[52] 이 조약으로 동쪽 국경의 안전을 확보한 유스티니아누스는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던 아리우스파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준비할 수 있었다.

540년, 유스티니아누스가 이탈리아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호스로 1세가 이끄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침공했다. 수도로 돌아온 벨리사리우스는 즉시 이 전쟁에 투입되었다. 호스로 1세는 유스티니아누스와 맺은 협정을 어기고 메소포타미아, 북부 시리아, 로마령 아르메니아로 진격하여 주요 도시들을 약탈했고, 541년에는 북부 라지카(콜키스)를 침공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544년 다시 이탈리아로 소환되었다.

전쟁은 다른 장군들의 지휘 아래 장기간 지속되었으며, 543년에는 전염병이 로마군을 덮쳤다. 호스로 1세는 중요한 요충지인 에데사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양측은 큰 소득 없이 전투를 벌이다 545년 5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따라 로마는 약 2267.96kg의 금을 지불하고, 사산 왕조는 로마 제국 영토를 침공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551년 양국 간의 휴전 조약이 갱신되었지만, 라지카는 페르시아가 반환을 완강히 거부하여 휴전이 적용되지 않았고, 산악 지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557년 휴전 협정이 다시 갱신되면서 라지카도 포함되었다. 마침내 561년 말경 50년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로마는 연간 30000solidi의 공물을 바치기로 했고, 페르시아는 북방의 침략자들을 막는 중요한 방벽인 라지카에 대한 모든 권리 주장을 철회했다.

4. 4.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 (544–552)

벨리사리우스가 동부 전선에 가 있는 동안, 이탈리아에서 로마군의 상황은 매우 불리하게 달라져 있었다. 가혹한 재정 공출과 병사들의 약탈 행위로 인해 새 체제는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 동고트족 대다수는 끝내 항복하지 않았으며 541년 가을에 토틸라를 자신들의 왕으로 선포했다. 토틸라는 유능한 지도자였으며 542년에 남부 이탈리아에서 공세를 벌여 543년 나폴리를 점령하는 등 로마군을 무섭게 밀어내고 있었다.[68] 544년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이탈리아로 투입되어 토틸라에 대해 공세로 들어갔으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병력과 지원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고 결국 548년 나르세스로 교체되었다.[68] 나르세스는 우세한 병력과 지원으로 고트족을 몰아내어 552년 동고트 왕국의 수도 라벤나를 탈환하고 결국 동고트 왕국을 섬멸하였다. 이로써 이탈리아를 수복하고자 하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오랜 숙원은 이루어졌다.

동방으로 군사력이 집중되는 동안, 이탈리아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토틸라 왕 치하에서 동고트족은 빠르게 세력을 회복했다. 542년 승리를 거둔 후, 그들은 이탈리아 남부의 주요 도시들을 재정복하여 곧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장악했다. 벨리사리우스는 544년 말에 이탈리아로 다시 파견되었지만, 충분한 병력과 보급품이 부족했다. 전혀 진전이 없자 그는 548년에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벨리사리우스는 200척의 고트 함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68] 이 기간 동안 로마는 세 번이나 손바뀜을 했다. 먼저 546년 12월 동고트족에 의해 점령 및 인구 감소를 겪었고, 547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재정복되었으며, 550년 1월에 다시 고트족에게 함락되었다. 토틸라는 또한 시칠리아를 약탈하고 그리스 해안선을 공격했다.

마침내 유스티니아누스는 나르세스의 지휘 아래 약 3만 5천 명의 병력(2천 명은 별도로 파견되어 서고트족의 남부 히스파니아를 침공했다)[69]을 파견했다. 군대는 552년 6월 라벤나에 도착하여 한 달 만에 아펜니네 산맥의 부스타 갈로룸 전투에서 동고트족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켰고, 토틸라는 사망했다. 그해 10월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두 번째 전투가 벌어진 후, 동고트족의 저항은 마침내 꺾였다. 554년에는 대규모 프랑크족 침입이 카실리눔에서 패배했고, 이탈리아는 제국에 의해 확보되었지만, 나르세스는 남아있는 고트족의 거점들을 제압하는 데 몇 년이 걸렸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탈리아에는 1만 6천 명의 군대가 주둔했다.[70] 이탈리아를 회복하는 데 제국은 약 약 1360.8000000000002억kg의 금을 소비했다.[59]

4. 5. 히스파니아 원정과 이민족의 침략

552년 로마는 서고트족의 히스파니아를 침공하여 카르타헤나를 비롯한 남부 히스파니아의 몇몇 도시를 회복하였다. 이 원정은 중세 로마 제국의 최대 판도로 기록되는데, 이후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자 이 지역은 다시 로마 제국의 영향에서 바로 벗어났다.

또한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에 발칸반도는 투르크족과 슬라브족의 침입을 받았는데, 559년 슬라브족이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침공해 왔을 때 벨리사리우스가 투입되어 제국을 구원하였다. 561년에는 아바르족이 침공해 들어왔으나 보상금을 받고 물러났다.

서고트 왕국에서 찬탈자 아타나길드가 국왕 아길라 1세에 반란을 일으킬 때 지원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동로마 제국은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했다. 552년, 유스티니아누스는 당시 80대의 노장 리베리우스(그는 490년대 이후 동고트 왕을 섬겼다)에게 병력 2,000명을 주어 파견했다. 동로마군은 카르타헤나와 남동부 연안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동맹자인 새로운 국왕이 된 아타나길드에게 방해받기 전에 새롭게 스파니아 속주(''Provincia Spaniae'')를 설치했다. 이 전역은 동로마 제국의 팽창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에는 발칸 반도는 도나우 강 이북에 거주하는 튀르크계 및 슬라브계 여러 민족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이 지역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주로 외교적 수단과 방어 시스템 구축에 의존했다. 559년에 자벨가네스 칸이 이끄는 스크라비니족과 쿠트리굴족이 침입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했으나, 벨리사리우스에 의해 격퇴되었다.

4. 6. 결과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중세 로마 황제 중 가장 큰 군사적 업적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인 황제로서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 회복을 사명으로 여겼다. 직접 원정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 등 명장들을 기용하여 6세기 로마 제국의 영토 확장을 이끌었다.

황제 즉위 초, 사산조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여 530년 다라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531년 칼리니쿰 전투에서 패배 후 '영구 평화 조약'을 맺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페르시아에 5ton의 황금을 지급하고 동쪽 국경을 안정시킨 후, 서로마 제국 영토를 점령한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히스파니아 등 과거 로마 제국 영토 대부분을 수복하였으나, 이탈리아는 전쟁으로 황폐해져 복구가 어려웠고, 사망 3년 후 롬바르드족에게 국토 일부를 빼앗겼다. 페르시아에 대한 과도한 배상금은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고, 다뉴브강 너머 이민족의 공세는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다. 서부 전선에 장기간 전력을 소비한 로마는 새로운 침입자를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다. 사후 영토는 급격히 무너졌고, 재임 중 벨리사리우스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시기했다.

533년 벨리사리우스를 북아프리카 반달 왕국에 파견하여 아드 데키뭄 전투와 트리카마룸 전투에서 승리하고 카르타고를 점령했다. 겔리메르 왕은 항복 후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갔고, 사르데냐, 코르시카, 발레아레스 제도, 세우타가 회복되었다.[54] 아프리카 총독령이 설립되었으나,[56] 15년간 베르베르족과의 전쟁 등으로 붕괴 직전에 놓였다.[57] 548년까지 평정되었고,[58] 이후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아프리카 회복에는 제국에 약 약 45359.20kg의 금이 들었다.[59]

535년 동고트 왕국 내분을 이용하여 벨리사리우스를 이탈리아에 파견, 540년 수도 라벤나를 함락하고 왕 위티기스를 사로잡았으나, 동고트 잔당이 저항했다. 같은 해 사산 왕조와 항쟁을 재개하여 동서 양쪽에 적을 두게 되었다.

543년 흑사병(유스티니아누스의 페스트) 대유행으로 정부 기능이 마비되고 인적 자원이 타격받아 로마 제국 재건 사업이 쇠퇴했다. 548년 황후 테오도라가 사망했다.

로마 제국 재건 야망은 부분적으로만 실현되었다. 530년대 군사적 성공 이후 장기간 침체했고, 고트족과의 전쟁은 이탈리아를 파멸시켰다.[185] 중과세는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 최종 승리와 남부 스페인 정복은 제국 위신에 기여했지만, 대부분 덧없었다. 이탈리아 대부분은 568년 롬바르드족 침략으로 상실되었고, 1세기 내 아프리카 절반과 스페인이 제국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말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자체도 북쪽 야만족 침입에 안전하지 않았고, 호의적인 역사가 메난드로스 프로테크토르조차 노령으로 인한 쇠약 때문에 황제가 수도 방어에 실패했다고 설명했다.[186] 유스티니아누스는 동로마 제국 영토를 위험할 정도로 확장하면서 6세기 유럽 변화를 고려하지 못했다.[187] 역설적이지만, 그의 군사적 성공이 제국 쇠퇴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188]

5. 건축 사업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대규모 건축 계획을 통해 많은 건축 사업을 벌인 황제로도 유명하다. 그는 수로, 교량, 요새, 방어진지, 수도원, 고아원 등 다양한 건축물을 건설하고 지진으로 파괴된 도시를 재건했다.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건축 사업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217]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후원 아래 산 비탈레 성당이 완공되었으며, 이곳에는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의 모자이크가 있다.[218] 그가 진행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219] 니카의 난으로 소실된 교회를 웅장한 돔과 모자이크로 장식하여 재건한 것이다. 이 대성당은 수세기 동안 동방 기독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성사도 교회도 재건되었다.[220]

아야 소피아 대성당의 모자이크화


건축 사업은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 유적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모자이크가 발견되었으며, 543년에는 군복을 입고 말을 탄 유스티니아누스의 동상이 세워진 기둥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제작되었다.[221] 유스티니아누스는 귀족들과의 경쟁심, 그리고 왕조의 권위 강화를 위해 수도에서의 건축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222]

유스티니아누스는 제국의 국경을 강화하기 위해 요새를 건설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자원 공급을 위해 지하 저수지를 건설했다. 또한, 전략적 요충지인 다라를 홍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아치 댐을 건설하고, 비티니아에는 상가리우스 다리를 건설하여 동방으로의 보급로를 확보했다. 그는 지진이나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들을 재건하고, 자신의 출생지 근처에 유스티니아나 프리마를 건설하여 일리리쿰 속주의 중심지로 삼으려 했다.

6. 종교 문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제국 통합을 위해 종교 통합이 필수적이라고 믿었으며, 정교회 신앙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속 정치와 마찬가지로 교회 정책에서도 전제적인 모습을 보였다. 종교와 법의 모든 것을 통제하며, 삼위일체강생을 법으로 널리 알리고 모든 이단에게는 적절한 처벌을 가하겠다고 위협했다.[190]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그려진 포리스 동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동전 앞면에 십자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처음으로 묘사된 황제 중 한 명이다.


그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조를 교회의 유일한 상징으로 삼았고,[192] 네 차례의 교회 일치 촉진 운동 회의에서 교회법에 법적 효력을 부여했다.[193]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교회가 황제의 의지와 명령에 따를 것을 동의했다.[194]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단성론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종교적 통합을 위해 신민들에게 교리적 타협을 강요했지만, 이 정책은 실패했다.[189] 황후 테오도라는 단성론에 동정적이었으며, 초기 친단성론파 궁정 음모의 배후로 여겨지기도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재위 기간 동안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신학 논문을 저술했다.[189]

그는 수도원 제도를 보호하고 확장하며 교회와 성직자의 권리를 보장했다. 수도승에게 재산 상속권과 제국 국고 등으로부터 매년 헌금을 받을 권리를 주었고, 속인에게 수도원 재산을 양도하는 것을 금지했다.

니카의 난으로 파괴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재건에 금 2만 파운드를 투입했다.[196] 팔각형 금박 돔과 모자이크를 갖춘 새로운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동방 정교회의 중심이자 상징이 되었다.

529년, 유스티니아누스의 명령으로 아테네아카데메이아가 국가 관리에 들어가면서 헬레니즘 교육 기관은 사실상 폐쇄되었다. 다신교는 적극 탄압받았다. 에페소스의 요한은 소아시아에서만 7만 명의 다신교도가 개종했다고 기록한다.[202] 돈강 유역의 헬리족[203], 훈족[204], 카프카스[205]의 압하지아족[206], 타잔족 등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리비아 사막 아우기리아의 아몬 신 숭배,[207] 나일강 제1 폭포 필라에 섬의 이시스 여신 숭배도 금지되었다.[208] 장로 줄리안[209]과 주교 롱기누스[210]나바테아 왕국에서 전도했고, 유스티니아누스는 이집트 주교를 예멘으로 파견해 기독교를 강화했다.[211]

유대인은 시민권을 제한받고,[212] 종교적 혜택을 위협받았으며,[213] 황제는 회당 내부 문제에 개입하고,[214] 일시적으로 예배 시 히브리어 사용을 금지했다. 반항자들은 신체형, 추방, 재산 몰수 위협을 받았다. 벨리사리우스의 반달 전쟁에 저항한 볼륨 유대인들은 강제 개종되었고, 회당은 교회가 되었다.[207]

황제는 기독교 개종에 저항하며 폭동을 일으킨 사마리아인에게 가혹한 칙령으로 대응했지만, 치세 말까지 사마리아 내 기독교인 공격을 막지 못했다. 마니교도 역시 추방, 처형 등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215]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많은 마니교도가 종교 재판 후 황제 앞에서 화형이나 물고문 등으로 처형되었다.[216]

6. 1. 동서 교회의 통합 노력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484년부터 시작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아카키우스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황제가 되기 전부터 삼촌 유스티누스 1세를 도왔다. 519년 3월 교황 호르미스다의 사절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양 교회의 분열을 끝냈을 때 유스티니아누스의 역할이 컸다.[189] 황제 즉위 후에도 그는 군사적으로 이탈리아 등 옛 서로마 제국을 수복하는 데 앞장섰고, 종교적으로도 서방 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

5세기 후반부터 동로마 황제는 칼케돈 공의회 신조를 거부하는 급진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교회 문제에 어려움을 겪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로마 교황레오 1세의 교서는 동방에서 악마의 짓으로 여겨져 로마 교회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로마의 통합을 유지하려 했으나,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면서 동방의 반칼케돈파를 억제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197]

518년 삼촌의 즉위와 함께 유스티니아누스는 교회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483년부터 지속된 동서 교회의 분열을 종식시키려 했다. 그는 로마 교황청을 최고의 교회 권위로 인정했지만, 동방의 많은 사람들은 이에 반발했다. 그럼에도 유스티니아누스는 실베리우스나 비기리우스와 같은 로마 교황에 대해 전제적인 태도를 취했다.

교리적 파벌에 타협을 강요할 수는 없었지만, 유스티니아누스는 화해를 위해 노력하며 교회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테오파스키테 논쟁(스키티파가 제시한 타협안 공식화[198])에서 그는 처음에는 신중했으나, 점차 문제가 되는 신조가 정통이며 단성론과의 타협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인식했다. 533년 칼케돈파와 단성론파 간의 종교 회의를 열었으나 실패했다.[198]

553년 3월 15일 종교 칙령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타협을 시도했고,[199] 요한 2세가 제국의 종파를 정통 신앙으로 인정했다고 자평했다.[200] 그는 단성론 주교와 수도사들을 박해하여 지역 주민들의 반감을 샀으나, 이후 칼케돈 신조를 유지하면서 단성론을 포용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궁정에서는 그가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황후 테오도라는 단성론의 전면적인 수용을 원했다.

삼장 논쟁 비난(제2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참조)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동방과 서방 모두를 만족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교황은 비난에 동의했지만, 서방에서는 황제가 칼케돈 포고와 상반된 행동을 한다고 비판했다. 동방에서는 많은 사절들이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복종했지만, 단성론자들은 여전히 불만을 품었다.

6. 2. 그리스도 단성론의 문제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래 계속된 단성론 문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괴롭혔다. 단성론은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시리아이집트에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며, 그리스 민족 의식과 로마 통치에 대한 불만과 결합하여 제국 분열의 원인이 되고 있었다.[254] 황후 테오도라는 단성론에 우호적이었으며, 단성론자들을 후원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단성론 수도원과 교회를 다시 짓도록 지원했다.[254]

5세기 후반, 동로마 황제는 교회 문제에서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칼케돈 공의회의 신조는 분파 간 교리 차이를 조정하려는 시도였으나, 급진주의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교황 레오 1세의 교서는 동방에서 악마의 짓으로 여겨졌고, 로마 교회와의 통합 유지는 황제에게 중요한 과제였다. 또한, 칼케돈 공의회에 불만을 품은 동방의 여러 파벌을 진정시켜야 했다.

518년 삼촌의 즉위와 함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교회 정치에 참여하여 483년부터 지속된 로마와 동로마 간 단성론 분열을 종식시키려 했다. 그는 로마 교황청을 최고의 교회 권위로 인정하며[197] 서방 정책의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실베리우스나 비기리우스와 같은 로마 교황에 대해 전제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교리적 타협을 통해 종교적 통합을 이루려 했으나 실패했다. 테오파스키테 논쟁에서 그의 태도는 처음에는 신중했으나, 점차 타협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533년 종교 회의를 열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98]

553년 3월 15일 종교 칙령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타협을 시도했고[199], 교황 요한 2세는 제국의 종파를 정통 신앙으로 인정했다.[200] 그는 단성론 주교와 수도사들에게 가혹한 박해를 가하기도 했지만, 칼케돈 신조를 유지하면서 단성론을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삼장 논쟁(제2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참조)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동방과 서방 모두를 만족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6. 3. 교황권의 확립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로마의 교회 감독을 전 세계 기독교회의 머리이자 교리 확정자, 그리고 이단을 처벌하는 권위자로 임명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의 효력이 발생한 538년은 교황이 합법적으로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한 시발점으로 간주된다.[197] 비질리우스는 538년에 로마 장군 벨리사리우스의 보호 아래 교황 보좌에 올랐다.[60]

6. 4. 교황과의 충돌

544년 유스티니아누스는 칙령을 내려 《삼장서》(''kephalia'')를 비판했는데, 이는 칼케돈 공의회의 결의와 단성론자 모두의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서방교회는 삼장에 대한 비판을 거부했고, 마침 토틸라의 로마 침공을 피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와 있던 교황 비질리오와 충돌했다.[189] 그러나 비질리오 교황은 황후와 황제의 압력에 삼장서에 대한 유죄 선고를 발표했으나 이는 더욱 큰 문제를 낳았다. 황후 테오도라가 죽은 이후에는 더욱 문제가 커져 황제와 교황은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았다.[189]

6. 5. 말년의 종교 문제

564년 말, 유스티니아누스는 예수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다는 가현설적인 칙령을 발표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체는 결코 썩지 않으며 십자가에서는 단지 고통받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주장이었다.[164] 유스티니아누스가 마지막으로 발표한 법령은 성탄절과 공현절의 공식 날짜를 확인하는 법령이었다.

말년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신학 문제에 더욱 몰두했으며, 553년에는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주재하기도 했다.[164] 그는 가톨릭 교리에 대한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특히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많은 신자를 가진 단성론을 위협으로 간주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단성론에 반대하며 칼케돈 교의를 확인하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종교적 통합을 위해 신민들에게 교리적 타협을 강요하려 했으나, 이는 실패로 끝났다.[189]

세속 정치와 마찬가지로 유스티니아누스는 교회 정책에서도 전제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종교와 법의 모든 것을 통제하며, 삼위일체강생을 법으로 널리 퍼뜨리고 모든 이단에게 처벌을 가했다.[190] 그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조를 교회의 유일한 상징으로 삼고, 교회 일치 촉진 운동 회의에서 교회법에 법적 효력을 부여했다.[192][193]

553년 제2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교회가 황제의 의지와 명령에 반하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을 것에 동의했다.[194]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단을 탄압하고 수도원 제도를 보호, 확장하며 교회와 성직자의 권리를 보장했다. 그는 수도승에게 재산 상속권과 제국 국고 등으로부터 매년 헌금을 받을 권리를 주었고, 속인에게 수도원 재산을 양도하는 것을 금지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니카의 난으로 파괴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재건하는데 금 2만 파운드를 들였다.[196] 새로 지어진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동방 정교회의 핵심이자 기념물이 되었다.

7. 평가

후대에 "대제"라고 불린 것처럼,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고대 후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의 통치는 동로마 제국사에서 획기적인 시대를 이루었고, 당시 제국의 영토를 넓혔다. 이는 야심적이지만 궁극적으로 실패한 "제국의 재건"(renovatio imperii)으로 특징지어진다.[145] 이 야망은 로마를 포함한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부분적으로 회복한 것에 나타난다. 그러나 그 영광의 시대는 543년흑사병으로 끝을 알리게 되었다. 제국은 영토 축소의 시대에 들어가 9세기까지 회복되지 못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중요한 유산은 로마법을 통합하여 다시 쓴 『로마법전』(Corpus Iuris Civilis)이며, 이는 많은 현대 국가의 대륙법의 기초로 남아 있다. 그의 통치는 초기 비잔틴 문화의 흥륭에도 영향을 미쳤고, 그의 건축 사업은 성 소피아 대성당과 같은 걸작을 낳았으며, 이는 800년 이상 동방 정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인으로 여겨지며, 루터 교회의 일부에서도 축복받고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를 율리우스력 11월 14일(현재의 그레고리력에서는 11월 27일)에 기념한다. 또한 그는 루터 교회 미주리 시노드와 캐나다 루터 교회에서는 성인력 11월 14일에 기념된다. 반대로 동시대의 프로코피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를 "잔혹하고 탐욕스럽고 무능한 통치자"로 보았다.[146]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에 관한 주요 사료는 역사가 프로코피우스가 제공하고 있다. 유실된 시리아어로 된 에페소의 요한의 연대기는 후대의 연대기의 사료가 되어, 많은 추가적인 세부 사항을 아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 두 역사가는 유스티니아누스와 황후 테오도라에 대해 매우 신랄하다. 또한 프로코피우스는 『비사』(Anekdota)를 저술했는데, 여기에는 유스티니아누스의 궁정에서 일어난 여러 스캔들이 서술되어 있다. 다른 사료로는 아가티아스, 메난드로스 프로테크토르, 요한 말라라스, 부활절 연대기, 마르켈리누스 코메스, 툰누나의 빅토르가 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적극적인 원정으로 로마 제국의 옛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고, 『로마법전』 편찬과 아야 소피아 대성당 재건 등 문화적 업적도 남겼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자신은 친정에 나선 경우가 거의 없었고, 실제로는 벨리사리우스의 공이 컸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는 그의 공적에 보답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재능과 명성을 질투하며 항상 냉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이러한 대규모 사업의 대부분은 결과적으로 국가 재정 파탄을 초래했고, 이를 메우기 위한 중과세로 경제는 피폐해졌으며, 잇따른 전란으로 이탈리아 여러 도시가 파괴되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더욱이 이러한 상황에서 중과세를 부과했기 때문에 정복지는 완전히 피폐해졌다. 이러한 통치에, 옛 서로마 제국 영토에서 로마 제국의 부흥을 바랐던 사람들은 환멸을 느껴 이탈했다.

이러한 이유로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동로마 제국은 급속히 쇠퇴하여,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대제국에서 동남유럽·동지중해 지역 강국으로 전환해야만 했다. 마누엘 1세 콤네누스처럼 유스티니아누스 이후에도 대제국으로서의 지위 회복을 목표한 황제도 있었지만, 모두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는, 옛 로마의 부흥을 추구했던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고대 로마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고, 그의 후계자들에게는 경제가 파탄 나고 피폐해진 국가를 물려주게 되었다. 하지만 일시적이었을지라도 옛 로마 제국의 영토를 회복했고, 특히 국호의 유래가 된 도시 로마를 회복한 것은, 그 후 동로마 제국이 계속 유지한 "우리 나라는 로마 제국이다"라는 이데올로기의 근거가 되어, 이후 고난의 시대를 맞이한 제국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었다.[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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